예레미야의 기도 (32장)

어제 우리가 묵상한 예레미야 32:16-25에는 예레미야의 기도가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우리가 익숙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익숙한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제 묵상한 16-25절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기억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다분히 신학적이지만 단순히 신학적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다분히 신학적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깨닫고 더욱 깨달아 가는 기도입니다.
17절, "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기도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기억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 예레미야는 그 내용을 기도 가운데 끄집어 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어 현재 생각의 무대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게 조명을 비춥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생활에서 경험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 것들을 단순히 기억의 창고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무대 위에 그 생각을 올려놓고 그곳에 무대의 조명을 집중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기도이자 수많은 성인들의 기도 방식입니다. 예레미야는 도대체 왜 하나님이 이제 다 망한 나라에서 친척의 빚을 갚고 땅을 지키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해가 되질 않지만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종으로 끝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다분히 신학적이지만 단순히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충분히 감정적이며 ("슬프도소이다" 17절) 그리고 도전적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 25절)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그냥 삼키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을 토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고자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그냥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겸허함도 겸비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만 아는 것으로 상황을 이해하자니 답답해서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기도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기도는 하나님과 하는 씨름입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현재 상황은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이제 남왕국 유다도 더 이상 왕국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친척의 빚을 갚아 그 땅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것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따집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신학적 논쟁이자 실제 상황에 대한 씨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레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심판과 회복에 대한 확실함입니다.
심판에 대한 확실함과 명분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28-35절). 그리고 회복에 대한 확실함과 구체적인 내용이 내일 묵상하는 본문입니다 (36-42절)
기도하기 전에 우리 마음의 무대 위에 온통 이 세상 생각과 문제 그리고 내가 주인공처럼 무대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면 기도 가운데 관점이 바뀌는 축복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주인공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바람직한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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